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엄 미사 (문단 편집) === 작곡 배경과 과정 === 베토벤은 1807년에 [[요제프 하이든|하이든]]이 오랫동안 봉직했던 에스테르하지 가문을 위해 미사 C장조를 작곡해 준 적이 있었지만, 이 곡은 초연 때도 그랬고 그 이후에도 '뭔가 2% 부족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결국 그 뒤로 베토벤은 종교 음악을 한동안 쓰지 않았는데, 생애 후반기에 가서 다시 미사곡을 쓰기 시작한 것은 나름대로 복잡한 사연이 있었다. 베토벤의 가장 중요한 귀족 후원자들 중에는 당시 [[신성 로마 제국]][* 이 시기 신성 로마 제국은 이름만 남은 허울뿐인 껍데기에 불과했고, 합스부르크 왕가가 제국에서 실질적으로 통치하는 지역은 [[오스트리아 대공국]]과 [[보헤미아 왕국]],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뿐이었다. 대신 신성 로마 제국 외부에서 합스부르크 왕가는 [[헝가리 왕국]], [[크로아티아 왕국]], [[트란실바니아 대공국|에르데이 대공국]],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 [[부코비나 공국]] 같은 동유럽 영지나 [[밀라노 공국]] 같은 이탈리아 영토를 소유하고 있는 유럽의 열강 국가였다.]의 황제 가문인 [[합스부르크 제국|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황자였던 [[루트비히 판 베토벤/인간관계#s-2.7|루돌프 대공]]이 있었다. 비록 선천적인 [[뇌전증|간질병]] 때문에 군인의 꿈을 접고 성직의 길을 걸었으나 황족이라는 신분과 추기경이라는 가톨릭 고위 성직자로서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었고 또한 엄청난 음악 애호가이자 열렬한 베토벤 팬이었다.[* 아마추어 작곡가이기도 했다. [[디아벨리 변주곡]] 곡명의 주인공인 악보 출판업자 디아벨리가 독일에서 잘 알려진 50명의 음악가를 모아 변주곡 모음집을 만들려고 했을 때 루돌프 대공도 그 명단에 있었다.] 그는 베토벤을 경제적으로 후원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런저런 문제 때문에 요주의 인물로 당국에 찍혀 있던 베토벤을 보호해 주기도 했다.[* 베토벤은 정치적/종교적으로 위험한 발언을 해서 자주 주변 사람들을 긴장시켰다. 독일 귀족들이 악당 중의 악당으로 싫어하는 나폴레옹을 한때나마 찬양했던 것이 대표적.] 베토벤 역시 루돌프 대공의 호의에 대한 감사로 여러 작품을 그에게 헌정하였으며 이 장엄 미사도 루돌프 대공에게 헌정되었다. 이처럼 베토벤과 각별한 사이였던 루돌프 대공이 1819년에 올뮈츠[* 현 [[체코]] [[올로모우츠]]]의 대주교로 취임하게 되었는데, 이미 전년도에 이 소식을 들은 바 있었던 베토벤은 이 취임식의 미사에서 연주할 목표로 이 미사곡의 작곡에 착수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느린 작곡 진척도 때문에 이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고, 결국 마감 시간을 놓친 이 구상은 장장 5년에 걸쳐 거대한 대작으로 변모했다. 이왕 작곡을 시작한 김에 이벤트용 작품이 아니라 자신만의 의도와 철학에 의거한 대작을 창작하겠다는 식으로 계획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 이 장엄 미사는 9번 교향곡과 거의 병행해서 작곡했는데, 두 곡 모두 그 동안 이 분야에서 찾아보기 힘든 복잡한 구성과 장대한 규모를 지니고 있었으므로 작곡 속도는 대단히 더디게 진행되었다. 이 두 대작을 창작할 당시 베토벤은 굉장히 신경이 날카로웠기 때문에 한창 작곡 중에 약속이나 연락 없이 찾아오면 시중들던 하녀든 절친한 친구든 귀족 나으리든 간에 무조건 욕설을 퍼부으며 내쫓아 버렸다는 기록이 있다. 그래서 굳이 베토벤을 만나기 위해서는 그가 작곡을 마치고 쉴 때까지 무작정 밖에서 기다려야 했다(...). 베토벤은 작곡에 집중하기 위해 한동안 빈을 떠나 [[뫼들링]]이라는 한적한 시골에서 지내기도 했는데, 이때 고용된 하녀들이 베토벤의 극에 달한 괴팍함을 견뎌내지 못하고 모두 1달도 되기 전에 그만뒀으며 심지어 밤중에 몰래 도망간 경우도 있었다. 또한 작곡할 때 문을 걸어 잠근 채 큰 소리로 소절을 불러재꼈으며 악상이 떠오르지 않거나 뭔가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밤늦은 시간에도 온 동네가 떠나갈 정도로 소리를 질렀다고 하는데, 당시 뫼들링 사람들은 이 위대한 거장을 모신 혜택(?)을 톡톡히 받았을 것 같다.[* 그래도 뫼들링은 이후에 베토벤의 후기 명작들이 탄생한 곳이라는 명예를 얻었다. 현재 뫼들링에는 베토벤 기념관이 있으며 베토벤과 관련된 관광 상품으로 꽤 짭짤한 소득을 올리고 있다. 관광객들이 이 시골 마을을 찾는 유일한 이유도 바로 베토벤과 뮈들링의 인연 때문. 이게 다 당시 주민들이 괴짜 대작곡가의 기행을 잘 참고 견뎌준(?) 덕분일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